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라곤의 카탈리나 (문단 편집) === 냉대받는 왕세자비 ===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남자 못지 않은 왕의 의무를 보이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전장에 나갔고, 카탈리나는 이때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의 장남 [[아서 튜더]]와 맞선(?)을 봤고, 두 아이는 증인들 앞에서 아무 이상 없음을 확인받고 약혼이 성사되었다. 15세가 된 1501년 카탈리나는 잉글랜드로 가서 1세 연하인 아서와 결혼했다. 약혼 후 정식 결혼 전 여행을 하면서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순례지]]로 유명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방문했는데, 이 때 사고가 발생했다. 콤포스텔라 성당에는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라는 큰 향로가 있었는데, 이 향로를 성당 천장에 매달고 이를 줄로 당겨 흔들어서 분향했다. 그런데 캐서린이 성당을 방문했을 당시 이를 맡은 [[사제]]들이 줄을 당기다가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이 향로가 그만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사고는 캐서린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조 현상이기도 했다. 아서 튜더는 부왕 헨리 7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왕세자였으나 유달리 병약한 체질이었고, 결혼 기간도 불과 몇 개월이었기에, 과연 [[성관계|부부관계]]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부]]가 [[결혼]] 서약을 했더라도 동침을 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봤기 때문에, 이 부부가 동침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결혼을 했다고 볼 수 없었다. 후에 캐서린은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와 결혼하면서 자신이 아서와 부부관계를 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여서 결혼이 성사됐다. 일단 캐서린과 아서가 부부 관계를 못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긴 하지만 이견도 있다. 즉, 결혼 기간이 대략 20주 정도인데 한번도 동침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아서가 그렇게까지 병약한 것은 아니고 캐서린과 동침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아서가 결혼식 다음날 친구들에게 >"어젯밤 [[스페인]]을 정복했다." 고 자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기록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관념상 '남자가 허약해서 아내와 동침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성적 무능력의 낙인이 찍히는 것으로 엄청나게 망신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아서 튜더는 일국의 왕세자인데, '왕세자가 허약하여 사내 구실을 못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의 자존심과 위신에 얼마나 큰 타격이 되겠는가? 극단적으로는 생식 불능을 이유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남성이 성적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경우가 흔하며, 그 때문에 적지 않은 남성들이 거짓말과 과장을 섞어 가며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곤 한다. 하물며 중•근세 사회에, 오늘 내일 하는 노인도 아니고 [[신혼]]의 젊은 신랑이 '어젯 밤 새 신부와 초야를 치르지 못했다', 즉 본인이 '성적으로 무능력하여 자기 아내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부실한 남편'이라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는 일을 치르지 못했을지라도 남들 앞에서는 허세를 섞어서라도 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어쨌든 결혼하고 그 이듬해인 1502년에 어린 부부는 아서의 영지인 웨일즈로 여행을 갔다가 모두 병에 걸리는데, 캐서린은 회복했지만 아서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로써 캐서린은 16세에 '왕세자의 미망인'(Princess dowager)이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헨리 7세]]는 사돈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지참금]]을 다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며느리인 캐서린이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오랜 [[장미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터라,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는 다른 나라 군주들에 비해서 부유하지 못한 데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 [[헨리 7세]]의 지참금 지급 요청에 페르난도 2세는 "지참금을 다 보냈다"고 주장해서 캐서린만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 사이에서 불쌍하게 애매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헨리 7세는 [[에스파냐]]와의 동맹 및 지참금을 놓치기 싫어했기에 차남이자 새로운 후계자가 된 헨리, 즉 미래의 [[헨리 8세]]와 큰며느리였던 캐서린을 맺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페르난도 2세에게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이 확정적이라는 답은 주려 하지 않았다. 지참금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헨리 7세]]는 낯선 나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며느리 캐서린에게 >"너는 내 식객이나 마찬가지다." 라며 심하게 눈치를 주고 생활비까지 끊어버렸다. 실제로 이 시기에 캐서린이 친정아버지 페르난도 2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헨리 7세의 푸대접으로 대국의 왕녀라는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빈곤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시아버지의 궁정에서조차 소외된 상태였던지라,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들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옷도 없어서 에스파냐에서 가져온 낡은 옷을 입고 지냈다. 사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조차 힘든 형편이었다. 그래서 캐서린은 지참금으로 가져온 보석과 식기를 팔아서 생활해야 했는데, 그래도 모자라서 결국 빚을 지게 되어 친정인 스페인에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다. 이 와중에 [[헨리 7세]]는 "캐서린을 차남 헨리와 약혼시키겠다"고 간을 보다가, "지참금을 다 못 받아냈으니 취소하자"는 등 계속 [[희망고문]]을 해댔다. 더구나 친아버지라는 [[페르난도 2세]] 또한 캐서린에게 생활비만 보내줄 뿐 딱히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먼 잉글랜드로 떠나보낸 딸의 안위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가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